모빌리티 디자인에서 VR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정재원 책임연구원 / VR LAB 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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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D
Q1.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기아디자인모델개발실 VR랩에서 디자인 비주얼라이징을 담당하는 정재원 책임연구원입니다. 입사 이래 계속 지금의 업무를 맡아왔고, 아마 퇴사할 때까지 지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속된 말로 ‘고인물’인 것 같지만, (웃음) 나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관련 산업 동향을 항상 민감하게 체크합니다. 아마도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검색인 것 같아요.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검색하는데, 원하는 정보를 상당히 잘 찾는 편입니다.
Q2.
현재 VR랩을 이끌고 계십니다. VR랩은 어떤 일을 하나요?
저희 VR랩은 각 멤버의 능력이 뛰어나서 딱히 누가 이끌어간다는 느낌은 없어요. 저는 멤버가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기아 디자인센터 내에서 진행하는 CG 작업 대부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3D 데이터를 활용한 렌더링, 실시간 리뷰 및 품평 콘텐츠 제작, 진행 등이 대표적이죠. 또한 비주얼 관련 신기술 연구 및 투자도 진행합니다. 디자인센터에 계신 많은 분이 동감하시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프로젝트가 꾸준히 늘면서 업무 영역도 함께 넓어지는 터라 고민이 많습니다. 디자인 프로세스를 디지털로 전환하니까 3D 데이터가 매일 쏟아져 나오네요. 디지털 기반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가리켜 DDD(Data Driven Design)라고 부릅니다. 차량의 3D 데이터가 만들어지면 저희 VR랩에서 예쁘게 꽃단장해서 여기저기 활용가능한 콘텐츠로 가공합니다. 저희가 마지막 단계의 업무를 하고 있기에 주목받는 경우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디자인과 고품질의 3D 모델링이 선행되어야 작업이 가능합니다.
Q3.
전통적인 클레이 기반의 피지컬 모델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반의 버추얼 모델로 리뷰를 진행할 때 나타나는 혁신적인 면모와 그 이점으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모두 짐작하시다시피 버추얼 모델 활용의 가장 큰 장점은 시간과 비용의 절감입니다. 또한 디자인 용이성도 높아지죠. 피지컬 모델과 비교해 디자인 숙성 과정이 더 빠르고 쉽습니다. 피지컬 기반 모델 제작에는 많은 리소스가 필요하지만, 버추얼 기반 모델의 경우 사무실에 앉아서도 진행할 수 있어요. 리뷰 단계에서도 원하는 시점, 투시 등을 자유롭게 돌려보고 관련 자료도 빠르게 비교할 수 있는 점도 이점입니다.
Q4.
버추얼 모델을 만들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지점이 궁금합니다.
최종적인 데이터 활용 목적에 따라 매번 달라집니다. 렌더링의 경우, 대외적으로 공개할 때는 당연히 멋지게 나오는 게 가장 중요하죠. 많은 시간을 투자해 작업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당장 빠르게 결과물이 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는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품질에서 타협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최대한 좋아 보이게 만드는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콘텐츠와 HMD(Head Mounted Display) 고글을 사용한 품평 데이터 제작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글을 사용할 때는 퍼포먼스가 나와야 하므로 데이터 크기 최적화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네요. 조명 및 카메라 앵글도 차량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한 마디로 상황에 따라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디자인이 잘 보이고 예쁘게 보이도록 결과물을 만드는 중요성은 여전합니다.
장소 기반 무선 VR 장비. 20 × 20m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이 걸어다니며 리뷰할 수 있다.
Q5.
3D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술 집약적인 최첨단 결과물을 만들지만, 아날로그 경험을 대체하는 구현물을 꿈꾼다는 점에서 ‘디지털 크래프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반되는 면모를 다루실 때 어떻게 균형을 잡으시나요?
아날로그를 대체하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디지털로 구현한 디자인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눈앞에 있는 실물의 완벽함에는 못 미쳐요. 그래서 저희는 항상 극사실적인 결과물을 추구하지는 않아요. 디자인센터에서 디자인을 하고, 품평을 진행하는 과정은 담당자의 디자인을 누군가에게 세일즈하는 느낌과 유사합니다. 매달 열리는 품평회에서 디자인의 뛰어난 점을 알려야 하고, 적극적으로 마케팅도 해야 하죠. 품평 받는 차량이 더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약간의 과장도 필요하다고 봐요. 다만 형평성에 맞게 정해진 룰 안에서 진행해야 하겠죠. 이후 양산 준비 과정에서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디자인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잘못된 부분을 빨리 잡아내고 수정해야 하니까요. 이처럼 저희 업무는 단계별로 그에 맞는 대응이 필요합니다. 언제 아트를 해야 하고, 언제 다큐를 찍어야 하는지 잘 구별해야 합니다.
Q6.
HMD를 활용한 VR 리뷰 시스템 구축에 큰 역할을 맡고 계십니다. 전 세계에서 동시 접속해 협업하는 VR 리뷰 시스템은 여러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 같은데요. 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HMD를 활용하면 VR 공간에 들어가 해외에 있는 다른 디자이너와 함께 리뷰 및 협업할 수 있어요. 버추얼 리뷰의 가장 큰 혁신적 면모로 꼽을 만합니다. 원하는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디자인 리뷰를 할 수 있죠. 실제 한국, 유럽, 중국, 미국을 넘나들며 진행하는 VR 리뷰는 기아 디자인센터에서 흔하게 보이는 일상입니다. 팬데믹 시절, 해외 출장이 힘들었던 때에도 VR 리뷰가 제 역할을 잘했어요. 최고 경영진이 일정상 품평이 힘든 경우, VR을 활용해 다른 나라와 실시간 VR 품평을 진행한 일화도 있습니다.
Q7.
VR 콘텐츠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는다는 점에서 획기적입니다. 그만큼 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현실 속 경험의 괴리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어떻게 좁히려고 노력하시나요?
VR 콘텐츠는 두 세계의 간극을 좁히기도 하지만, 반대로 간극을 마음대로 활용할 때도 있습니다. 간극을 좁히는 시도는 ‘현실의 환경을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는 것’이며, 이는 시각적인 면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체험도 포함합니다. 최근 몇 년간 VR랩에서 진행한 연구 중 무선 스트리밍 기술을 활용한 장소 기반 VR이 있습니다. 가로세로 20m 정도 되는 영상 품평장에서 고글을 착용하고 무선으로 서버에서 화면을 스트리밍하는 방식인데요. 실제 상대방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면서 인터랙티브한 리뷰가 가능합니다. 시각적인 몰입감을 넘어 보다 사실적인 경험을 할 수 있죠. 최근 품평에서 활용한 기술입니다. 간극을 마음대로 활용할 때는 버추얼 공간의 이점에 집중합니다. 무한한 리뷰 공간을 자유롭게 텔레포트하며 이동할 수 있고, 리뷰 공간을 분리하고, 움직이고, 접고, 펼 수 있어요. 이렇게 글로 풀면 감이 잘 오지 않겠지만, 눈앞의 거대한 공간을 변형한다고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자동차 내장 리뷰용 VR 시팅벅. 정확한 위치에 앉아서 내장 디자인 및 공간감을 리뷰할 수 있다.
Q8.
VR랩에서는 데이터 기반으로 나올 수 있는 각종 이미지와 애니메이션도 작업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이나 영상 등 실물 기반의 콘텐츠와 가상 데이터로 축조하는 콘텐츠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최근 언리얼 엔진을 활용한 주행 영상을 품평에 활용했는데요. 콘텐츠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 같아요. 저희가 확보한 애니메이션 블루프린트에 차량 데이터만 바꾸면 새로운 영상을 만들 수 있거든요. 이렇게 만든 각 주행 애니메이션은 디자인 품평 시 해당 차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매번 보던 디자인을 실재감 있는 환경에서 주행하는 모습으로 접하면 완전히 다른 감성으로 다가와요. 물론 이런 결과물은 프로세스 단계상 최대한 현실과 비슷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예전에는 게임 안에 저희 데이터를 넣어서 플레이하는 주행 영상을 만들기도 했어요. 게임 패드를 가지고 직접 운전도 가능했고, 캐릭터가 차량에 탑승하는 장면과 총을 쏘는 것도 연출할 수 있었죠.
Q9.
사실적인 구현에 집중하고, 내부적으로 계속 소비되는 콘텐츠를 만들다 보면 자칫 동기 부여가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신만의 팁이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매월 반복적인 작업이 많아서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매년 새롭게 연구하는 내부 프로젝트가 많아서 딱히 지루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더불어 저는 업무가 재미있기도 하고 관련 분야 리서치, 신기술 연구 및 적용 등이 개인적으로 잘 맞는 것 같아요. 관련 분야에 관해서 검색도 많이 하고, 종종 해외 포럼이나 전시회에 참석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많은 자극을 받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다른 업체에서 진행하면 위기감을 느끼고 반성도 많이 하게 됩니다. 저는 업무와 관련해서 뒤처지는 게 싫습니다. 열정보다는 자존심 문제에 가까운 것 같아요.
Q10.
VR 콘텐츠에 대한 니즈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고민하는 지점 또한 많으실 텐데요. 몇 가지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VR 업계에서 하드웨어와 관련한 기술 발전 속도가 조금 더딘 편이에요. 차량 데이터는 워낙 대용량이고 들어가는 부품도 많아서 장비에 부하가 많이 가는 편입니다. HMD의 경우, 고해상도를 적용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최근 애플에서 ‘비전 프로’라는 헤드셋을 발표했는데요. 고해상도를 얘기하고 있지만 아직 레티나급까지는 못 간 것 같아요. 시야각(FOV)도 명확히 얘기하지 않고, 3D 관련 콘텐츠 내용도 없는 상황이고요. 출시 시점이 아직 많이 남은 상태인데 발표한 기능을 현재 100% 구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조금 보수적으로 보는 거지만요. 다만 VR 업계의 다른 회사들에 많은 자극을 주고 관련 산업에 발전을 가져오리라 예상합니다. 콘텐츠에 관한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해서 소프트웨어 및 장비만 받쳐준다면 저희가 구현해 보고 싶은 것들이 무척 많아요. 그래서 관련 산업의 발전에 항상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어요.
Q11.
전문적인 영역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쪽 필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우선 재미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게임 및 신기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VR랩에서는 값비싼 최신 장비를 마음껏 사용해 볼 기회가 많아요. 저는 여가에 게임을 즐기는데, 게임이 VR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실제 프리젠테이션 기법이나 환경 구축 등에서 참조한 적도 많고요. ‘덕업일치’랄까요? (웃음) 영화 〈탑건〉을 모티브로 품평 준비를 했던 적이 있어요. 노을이 질 때 항공모함에서 전투기가 발진하고, 우리 차량이 달려오고, BGM이 흘러나오고…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작업했는데, 아쉽게도 차량 콘셉트와 맞지 않아서 실제 사용하진 못했어요.
Q12.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나요?
최근 몇 년간 기업문화가 많이 바뀌었는데 워라밸이 대표적인 것 같아요. 조직에서 워라밸을 챙기라고 독려하니 저희야 고마울 뿐이죠. 교통체증 때문에 출근을 일찍 하는 편인데 그에 맞춰 퇴근도 일찍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정말 신기한 게, 예전보다 업무는 더 많아졌는데 업무시간 내에 마무리가 돼요. 그만큼 집중도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재택근무용 원격 접속이 지원되어서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잠깐잠깐 테스트도 하고요. 퇴근 이후에는 최대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해요. 아이와 게임도 하고, 프라모델도 같이 만들고요.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어서 이제 저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학원 다니느라 바쁜 모습을 보면 저 혼자 놀기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Q13.
10년 후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어떨까요?
10년 후에도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업무에 만족하고, 재미있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 모두 능력 좋고, 성격도 좋아서 오래오래 같이 일하고 싶어요. 다만 늘어나는 업무량만큼 인원도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기술 수준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요. 10년 후에는 대체 얼마나 발전할지 정말 기대됩니다. 더욱 고도화된 기술을 활용해 더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Double-D
Double-D는 2012년 설립 이후 브랜딩, 패키지, 편집, 광고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다. 2021년 기아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리뉴얼을 담당해 전용 서체 및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기아 디자인 매거진》의 태동부터 함께 고민하면서 현재 기획과 디자인을 맡고 있으며, 창작자를 위한 온라인 매거진 《비애티튜드》를 발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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