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Vol.9
그릇으로서의 아트워크, 환대로서의 전시
《오퍼짓 유나이티드 아트워크 전시회》

무세오 델라 페르마넨테, 2023년 4월 17일 -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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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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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디자인센터
요즘 유행인 챗GPT에게 물어봤다. “기아의 디자인 철학은 뭐니?” 똑똑한 챗GPT는 이내 자신있게 헛발질을 찼다. “The Power to Surprise입니다.” 없던 말을 지어낸 건 아니다. 2005년 수립한 기아의 브랜드 슬로건이니까. 2021년 기아자동차가 사명을 기아로 바꾸고 브랜드 슬로건 또한 ‘Movement that inspires’로 변경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조금 기가 막히지만. 틀렸다고 핀잔을 주며 다시 한번 채근해본다. “2021년 새롭게 정립한 기아의 디자인 철학은 뭐니?” 이제야 마음에 드는 답이 나온다. “Opposites United입니다.” 좋아! 그러면 심화 질문을 해볼까. “Opposites United를 구성하는 5 Pillars는 뭐야?” 다시 꼬이기 시작하는 챗GPT. 분명 다섯 가지 필라를 말하라고 했는데 가짓수도 빼먹고, 그 명칭도 각양각색이다. 아! 현재 무료로 이용가능한 챗GPT의 기억은 2021년 9월이 마지막이니, 2021년 3월 15일에 발표한 기아 디자인 철학에 대해 깊이 있게 습득할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챗GPT의 대항마인 구글의 ‘바드Bard’에게 똑같이 질문을 던져봤다. 근데 이 아이도 Opposites United까지는 맞추는데 심화 질문으로 들어가니 챗GPT보다 더 가관이구나. 결국 도긴개긴이다.
이런 인공지능의 행태를 멍청하다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건 엄연히 불공정한 요구다. 한 브랜드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한 핵심 키워드는 파악해서 읊을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은 신기루나 다름없다. 동일한 질문 앞에서 우리 인간의 머리도 백지장이 되지 않던가. 오히려 막힘 없이 요약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더욱 무서운 일이다. 단선적으로 파악되는 철학에는 생명력이 없다. 확장가능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인을 고민하는 입장에서는 크리에이티브가 철저히 봉쇄되고, 디자인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예측가능해 더 이상 흥미가 끌리지 않으니까. 오히려 헛발 차는 인공지능이 고마울 따름이다. 디자인 철학을 날카로운 언어로 재단할 수 없다면 결국 이를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알듯 말듯한 내러티브와 다양한 시각 요소로 구성한 디자인 매니페스토 영상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2021년 열린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기아관에 조심스럽게 등장한 상징적인 오브제들도 같은 맥락이다. 작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기아 디자인 철학 전시를 통해 Opposites United와 다섯 가지 필라에 대해 공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장을 연출한 것도 연장선 상에 있다.
작년 DDP에서 열린 기아 디자인 철학 전시회 모습.
이런 노력이 올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꽃을 피웠다. 세계 최고의 디자인 축제라 불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기아가 처음으로 단독으로 참여해 자신만의 공간을 꾸린 것이다. DDP에서 시도한 전시 콘셉트를 한층 업그레이드해서 《오퍼짓 유나이티드 아트워크 전시회》란 이름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근데 왜 아트워크 전시회일까? “아트워크라는 단어를 썼지만 저희가 예술을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아티스트는 경외로운 분들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트워크를 만든다는 의도로 접근한다면 오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바란 것은 기아 디자인 철학이 지닌 메시지를 담은 그릇(vessel)으로서의 전시였습니다. 현지인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며 다양한 피드백을 받고 앞으로 기아 디자인센터에서 어떤 애티튜드로 디자인을 대해야 할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202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기아관, 2022년 DDP 기아 디자인 철학 전시에 이어 올해 밀라노 전시까지 기아 디자인 철학을 공감각적으로 풀어내는 일을 연속성 있게 책임진 기아디자인전략팀 한현수 팀장의 말이다.
밀라노 시내에 설치한 기아 전시회 프로모션 이미지.
기아 전시회에는 수많은 관람객이 찾아왔다.
“저희가 바란 것은 기아 디자인 철학이 지닌 메시지를 담은 그릇으로서의 전시였습니다.”
— 기아디자인전략팀 한현수 팀장
밀라노 전시는 기아 디자인 철학을 지탱하는 다섯 가지 필라, 즉 인간의 삶을 위한 기술(Technology for Life), 자연과 조화되는 대담함(Bold for Nature), 이유 있는 즐거운 경험(Joy for Reason), 미래를 향한 혁신적 시도(Power to Progress), 평온 속의 긴장감(Tension for Serenity)을 독립적인 관으로 설정하고 그 앞뒤로 오퍼짓 로비(Opposites Lobby)와 오퍼짓 라운지(Opposites Lounge)를 두어 완결성을 높였다. 특히 처음 등장한 오퍼짓 로비는 기아의 디자인 철학인 ‘상반된 개념의 창의적 융합’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낯설게 느끼는 이의 마음을 활짝 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기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DDP에서 전시를 열면서 디자인 철학에 대해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여기 밀라노는 유럽 한복판입니다. 기아라는 브랜드가 생경한 분들도 많을 뿐더러 낯선 브랜드가 디자인 철학을 전시로 풀어내는 시도 자체가 관람객에게 벽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오퍼짓 유나이티드’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면서 다른 공간을 자연스럽게 체험하고 교감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작점을 안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 오퍼짓 로비에서 백과 흑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영상의 흐름을 따라가보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지식이 있지 않아도 오퍼짓 유나이티드란 단어가 지닌 뉘앙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의 이해를 통해 흥미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뇌를 적절히 자극하는 예열 작업인 셈이다.
Opposites Lobby의 모습
밀라노 전시는 DDP에서 선보인 콘셉트를 기반으로 형식과 내용을 더욱 간결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Technology for Life’는 디스플레이를 두드리는 인터랙션을 거쳐야 영상이 시작하는 기존 방식을 버리고 정육면체 큐브와 거대한 디스플레이 존에서 뿜어내는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만으로 메시지를 충분하게 전달하도록 의도했다. 길게 늘어뜨린 천들을 자연스럽게 겹쳐놓은 ‘Bold for Nature’는 단순히 빛을 투사하는 매개를 넘어 마치 자연을 탐험하는 유사 경험을 선사했고, 프랙탈 패턴의 금속과 목재를 결합한 인위적인 나무 모양의 오브제는 하늘을 비추는 우물이 연상되는 미니멀한 디스플레이 형식으로 교체하며 콘텐츠에 대한 집중도를 끌어올렸다. 중앙에 거대한 구을 설치하고 이를 사분할해 네 가지 영상을 동시에 틀어 벽을 둘러싼 거울에 끝없이 반사시키는 ‘Joy for Reason’ 또한 예전보다 색감과 시각 요소를 훨씬 감각적이고 비비드하게 바꾸었다. 벽을 따라 도열한 라이팅이 움직이며 한 편의 쇼를 진행하는 ‘Power to Progress’는 기본 콘셉트를 그대로 살리면서 가장 안쪽에 배치한 오브제를 기하학적인 팔면체로 단순화시켜 몰입감을 높였고, ‘Tension for Serenity’는 세 면의 거대한 디스플레이를 연속적으로 배치해 특별한 장치 없이도 장대한 영상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게 연출했다. 서울에서 화제가 됐던 오퍼짓 라운지 또한 인피니트 미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콘텐츠의 퀄리티와 다양성을 높이며 인스타그래머블한 매력도를 강화했다.
Technology for Life를 다룬 공간
Bold for Nature를 다룬 공간
Joy for Reason을 다룬 공간
이런 일련의 변화에서 감지되는 공통점은 바로 즐거움이다. 오브제를 발견하고, 콘텐츠와의 연관성을 추측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밀라노 전시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접근가능성이 무척 높아진 점은 이를 잘 반영한다. DDP 전시의 경우, 사전 예약을 한 후 선형적으로 이어진 여섯 개의 룸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봐야했다. 전시를 관람하는 자유도가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형태다. 밀라노 전시는 룸이 한 곳 더 늘어났지만 비선형적으로 구성해 각 공간에 독립성을 부여했고,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룸을 돌아다녀도 훨씬 편하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다. ‘Joy for Reason’ 공간 바닥에 비치한 수많은 공이 다채로운 색을 반사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공을 건드리며 촉각적으로 가지고 놀던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기아의 디자인 철학을 전달하는 전시이지만, 일단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평면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달까요. 흥미로움을 북돋으며 즐길 수 있는 관람이 선행되어야 나중에 회자될 가능성이 열립니다. 디자인 철학을 얼마나 제대로 전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가장 중요한 관객의 반응을 잊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희는 관람객이 즐거운 추억을 안고 돌아갔으면 하는 환대의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Power to Progress를 다룬 공간
Tension for Serenity를 다룬 공간
Opposites Lounge의 모습
다른 행사보다 좀 더 넓직한 내부 공간, 군데군데 설치한 벤치, 그리고 2층에 자리잡은 《기아 디자인 매거진》 코너와 각종 읽을 거리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의자들, 그리고 야간에 치뤄지는 각종 렉처와 뮤직 이벤트. 지금 돌이켜보면 기아의 전시에는 손님을 환영하고 가진 것을 넉넉하게 내어주는 한국 특유의 환대 문화가 녹아있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 때 열리는 행사가 무언가를 빨리 보고 나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관객 회전률이 빠를 수록 성공적이라고 자평하는 경우와는 정반대였다. 전시가 열린 1층 곳곳에는 바닥에 앉아 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는데 그들의 표정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에 들른 듯 했다. 디자인 철학을 전달하는 목적에 급급하지 않고 전시를 찾은 이들을 존중하며 자연스럽게 즐기고 노는 공간으로 아이덴티티를 설정한 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전시가 열린 무세오 델라 페르마넨테는 중앙에서 살짝 비켜나간 곳에 자리잡았는데도 전시 기간 동안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소셜 미디어와 푸오리 살로네 웹사이트에는 기아 전시장에서 찍은 다양한 사진들이 공유됐는데, 마치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밝게 웃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아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전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오히려 굉장히 지속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다가왔다.
건물 2층에서는 전시 기간 내내 포럼과 파티가 열렸다.
“디자인 철학을 얼마나 제대로 전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가장 중요한 관객의 반응을 잊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희는 관람객이 즐거운 추억을 안고 돌아갔으면 하는 환대의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 기아디자인전략팀 한현수 팀장
《오퍼짓 유나이티드 아트워크 전시회》는 푸오리 살로네 어워드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여한 1000여 개의 프로젝트 중 그 해 기억할 만한 비범한 예시에 수여하는 상이다.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최고상을 뽑고, 인터랙션, 지속가능성, 테크놀로지, 커뮤니케이션 등 네 가지 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하나씩 호명한다. 기아 전시는 그 중 테크놀로지 부문에서 단독으로 수상했다. 일반 관람객이 투표하는 인기상에서도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문가와 방문객 모두를 만족시켰다는 의미다. 밀라노 현지 전시장에 비치된 브로슈어의 마지막 장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말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모든 인스톨레이션은 훌륭한 아이디어의 일부입니다. 모든 인스톨레이션은 약속입니다. 기술에 생명을 불어넣고 기억에 남는 인간적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약속. 자연과 사람, 재료에 대한 존중으로 인류를 위한 견고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겠다는 약속. 예상치 못한 소소한 즐거움을 경험하는 약속.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겠다는 약속. 혼돈 속에서도 조화를 찾아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약속.” 밀라노에서 보낸 기아의 약속이 차근차근 실현되는 여정을 기대해본다.
전종현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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