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Vol.5
보는 법을 바꾼 그림
《세잔》

시카고 미술관, 2022년 5월 15일 – 2022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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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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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미술관
Paul Cezanne, Still Life with Apples and Peaches, 1905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여기 평생의 질문에 매달린 사람이 있다. “단 한 점의 작품으로 감각의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그림이 다른 어떤 그림보다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세기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여전히 ‘가장 위대한 화가’로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 그 주인공이다.  
사과, 물병, 복숭아, 테이블, 식탁보. 세잔의 그림에서 한없이 반복되는 정물이다. 우리 눈에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도무지 하나도 새롭지 않은 것에서 세잔은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그에게만 있는 특별한 재능이 세기의 작품을 낳은 것이라면, 그 재능은 꾸준한 탐구, 결코 만족하지 않는 실험일 것이다. 평생토록 동일한 요소를 한결같이 그린 세잔의 반복이란 미술사에서 거대한 혁신이었다. 그는 인상파에서 출발했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회화 영역을 개척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바바라 로즈Barbara Ellen Rose가 말한 세잔과 다른 화가의 차이점은 세잔의 특별함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거장으로 불리는 다른 화가들은 ‘이건 내가 아는 건데’로 시작한다면, 세잔은 ‘이걸 내가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까?’로 출발한다.”
세잔이 미술의 시각을 뒤집었다 한들 요즘의 예술계는 스타일 경쟁과 정치 사회적 의제가 범람 중이다. ‘여전히 동시대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상황. 하지만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그렇다’고 믿는다. 화려한 수식어 하나 없이 그저 ‘세잔(Cezanne)’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번 전시는 시카고 미술관에서 무려 70년 만에, 미국에서는 25년 만에 열리는 세잔의 회고전이다. 80점의 유화, 37점의 수채화 및 드로잉, 2개의 스케치북 완전판, 세잔이 쓰던 그림 도구가 한데 모인 전시는 금세기에 다시 보기 어렵다고 자부할 만하다.
‘세잔을 세잔으로 만드는 요소’에 초점을 맞춘 《세잔》은 유수의 큐레이터가 함께 만들었다. 시카고 미술관의 관장이자 19세기 유럽 회화 전문가인 글로리아 그룸Gloria Groom, 시카고 미술관의 근현대미술 큐레이터 케이틀린 하스켈Caitlin Haskell, 영국 테이트 모던의 큐레이터인 나탈리아 시들리나Natalia Sidlina가 그들이다. 최근 몇 년 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등 인상파의 거물을 다룬 주요 전시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던 큐레이터인 그룸이 공동 기획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지 않다.
그러나 하스켈과 시들리나의 참여는 다소 의아하다. 사실 시카고 미술관에서는 부서 간 협업이 흔치 않기도 하거니와, 엄밀히 말해 세잔은 현대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요점이다. “우리는 세잔을 인상파로만 규정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예술가이니까요.” 그룸의 말처럼 세 명의 큐레이터는 현대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2022년까지 계속되는 세잔의 반향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회화 그 자체, 현대 회화 그리고 20세기 모더니즘에 대해 제가 이해하는 많은 부분은 회화에 대한 세잔의 발견과 도전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잔이야말로 현대 미술의 영역에서 작업하는 아방가르드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스켈의 말을 들어보면, 세잔은 한때 급진적이었던 19세기 인상주의 실험과 20세기 모더니즘 사이를 잇는 본질적인 연결고리다. 세잔의 그림에는 1907~08년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의 등장과 함께 출현한 입체파를 암시하는 요소로 가득하다. 하스켈은 형태에 대한 세잔의 혁명적인 접근을 일컬어 ‘그림 평면의 파열’로 부르길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각면적인(faceted)’ 접근 방식이 곧 입체파의 효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봅니다. 원근법 아래 놓은 물체는 면의 각변(angle)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게 됩니다. 수평선에 평행한 여러 선은 넓이를 나타냅니다. 반면 수직선은 깊이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연은 평면적이기보다 입체적입니다. 때문에 빨강과 노랑으로 재현한 빛의 진동에서 공기를 느끼려면 파란색을 더 충분히 써야 합니다.”
— 세잔이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1904년 4월 15일자 편지 중에서
(미셸 오, 『세잔』,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6)
그렇다면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대체 그런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J. 폴 게티 미술관이 소장 중인 〈사과가 있는 정물〉(1893~94)은 궁금증을 푸는 좋은 예이다. 이 작품은 원근법의 표준 규칙이 무너져있고 어딘가 어설프다. 화병을 옆에서 보는 시점에서 그린 그림치고는 병의 입구가 너무 많이 보인다. 사과가 담긴 접시는 분명 가만히 있지만 왠지 심하게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림 속의 다양한 사물은 마치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본 모습이 뒤섞인 느낌이다. 그림 한 점에서 노골적으로 다양한 시점을 표현하던 세잔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묘사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Paul Cezanne, Still Life with Apples, 1893–94 © The J. Paul Getty Museum, Los Angeles
1880년 이후 세잔은 형식을 실험하면서 점점 더 잦은 ‘이단’을 일삼았다. 원근과 축적을 무시하고 형태는 파편화시켰다. 데생과 색채를 분리하고, 구성을 위해 추상까지 도입했다. 이러한 세잔의 실험 정신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르네상스 시대 이후 확립된 서구 회화의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놀라운 시도를 통해 세잔은 오랫동안 동료 예술가를 매료시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헨리 무어Henry Moore 뿐만 아니라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루시앙 프로이드Lucien Freud와 같은 20세기 후반의 거장에게도 세잔은 ‘새로운 예술가’였다. 무엇보다 21세기에 활동하는 현대 미술가조차 세잔의 영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세 명의 큐레이터는 루바이나 히미드Lubaina Himid, 캐리 제임스 마샬Kerry James Marshall, 뤽 튀망Luc Tuymans을 포함한 현대 미술가 10명에게 세잔의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각자의 작품에 녹아있는 세잔의 영향에 관한 글을 쓰도록 했다. “세잔이 오늘날에도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룸의 말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세잔의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Paul Cezanne, Montagne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 about 1887 ©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인물 사진: 1875년 무렵의 폴 세잔 © Universal Images Group
세잔은 계속해서 특정 주제로 되돌아갔다. 사과가 있는 정물, 생 빅투아르산, 목욕하는 사람,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실제 세잔은 생 빅투아르산을 40번 넘게 계속 그렸는데, 유화와 수채화 그리고 다른 그림의 배경으로 들어간 경우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정도다. 반복적인 모티브는 딱히 의미를 알기 힘들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가 얼마나 강박적으로 한 가지 문제에 매달려 거듭 고뇌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스타일Style’이다. 1906년까지 30여 년간 작업실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그림 방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세잔이다. 세 번째 인상파 전시 이후에는 무려 20년간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일한 소재를 반복해 그리면서 매번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반복되면서도 진화하는 실험을 단적으로 압축한 결과는 〈목욕하는 사람들(Les Grandes Baigneuses)〉에 숨겨져 있다. 그룸이 ‘단순화한 암호로서의 경관’이라 부르는 연작이다. “〈목욕하는 사람들〉은 세잔이 시도하던 추상화와 그의 생각이 이룬 정점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피카소와 마티스를 찾아볼 수 있어요. 서구 회화가 본격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광경이 담긴 흥미진진한 그림입니다.” 그래서인지 전시는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에 속하는 작품으로 장대한 끝을 마무리한다.
Paul Cezanne, Les Grandes Baigneuses [Bathers], ca. 1894-1905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세잔이 동일한 모티프를 지속해서 그림에 등장시킨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색이다. 그는 평생 색으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매달렸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섞어 사용하지 않고, 나란히 배열하거나 겹쳐두었다. 대조적인 색상을 미세하게 혼합하면서 대상이 지닌 본질적인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렸다. 세잔에게 색이란 ‘우리 뇌와 세상이 만나는 장소’였다. “사물을 색만으로 포착하고, 그 색으로 사물을 구별해내는 화가의 눈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색을 통해 형태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동일한 모티프를 강박적으로 반복한 형태로만 보이지만, 세잔에게는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한결같은 깊이를 찾아 매번 새롭게 출발하는 ‘시도’였다. 이러한 세잔의 시도는 대상을 보는 방법을 영원히 바꿔버렸다. 우리 눈앞에 매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는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오직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중요한 것이 표면보다는 깊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네. 사람들은 표면만을 변형시키고, 꾸미고, 치장하려 하지. 하지만 진실을 건드리지 않고 어떻게 깊이를 바꿀 수 있겠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앎일세.”
— 폴 세잔 (『세잔과의 대화』, 조정훈 역, 다빈치, 2002)
박수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예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상태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토마》(2021, 공동기획), 《7인의 지식인》(2020), 《노려본들 어쩔 것이냐》(2020, 공동기획), 《줌 백 카메라》(2019), 《유쾌한 뭉툭》(2018) 등을 기획했다. ‘Korea Research Fellow: 10x10’(2018, 2019),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2019)에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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