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Vol.9
K를 번역하는 사람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지난 2020년 영화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받았을 때 봉준호 감독과 함께 주목받은 이가 있습니다. 바로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Darcy Paquet입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을 두고 “한국인만 100%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얘기했는데요. 실제로 영화 속에는 짜파구리, 서울대, 반지하, 수석(壽石)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달시 파켓은 영문 번역을 통해 이를 절묘하게 재창조했습니다. 사실 그는 〈옥자〉를 제외한 봉 감독의 모든 작품 번역을 전담했고,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을 비롯해 〈밀정〉, 〈국제시장〉 등 지극히 한국적인 상업 영화와 〈우리들〉 같은 독립 영화에 이르기까지 100편이 훌쩍 넘는 한국 영화와 외국 관객을 언어적으로 단단하게 연결한 주인공입니다. 《기아 디자인 매거진》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영화 번역가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를 진심으로 아끼는 씨네필, 영화 평론가, 그리고 한국 독립 영화를 알리는 영화제 집행위원장까지 그가 지닌 다양한 면모를 살펴보았습니다. 달시 파켓의 목소리에는 20여 년간 쌓아 올린 한국 영화에 대한 진심이 가득 녹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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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닝오브
연출
미닝오브
촬영
김본희, 서시온, 홍경연
편집
김본희
About the Artist
달시 파켓은 1997년부터 한국에 정착한 영화 번역가 겸 영화 평론가다. ‘코리안 필름(koreafilm.org)’이란 웹사이트를 통해 해외 씨네필에게 한국 영화를 꾸준히 소개하던 그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의뢰로 한국 영화의 대외 홍보물 및 자막의 영문 감수를 맡으며 한국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영화를 통해 한국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파켓은 탁월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살인의 추억〉, 〈아가씨〉, 〈기생충〉, 〈헤어질 결심〉 등 200여 편에 달하는 영화의 영문 번역과 영문 감수를 맡으며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Screen International》, 《Variety》, 《씨네21》 등에 한국 영화에 관한 전문적인 비평문을 기고하며 영화 평론가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현재 부산 아시아 영화 학교 교수, 유럽 최대 규모의 아시아 전문 영화제인 이탈리아 우디네 극동영화제 프로그래머, 국내 최초로 독립∙저예산 우수 영화를 발굴하는 들꽃영화제의 설립자 겸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달시 파켓은 대중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번역가로 알려져 있다. 파켓의 번역은 단순히 국문을 영문으로 치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전반에 스며든 한국 고유의 역사, 문화, 그리고 서정을 전달한다. 그는 1999년부터 자신의 웹사이트 ‘코리안필름’에 한국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글을 꾸준히 올리며 한국 영화에 관한 애정 어린 분석과 비평을 멈추지 않았다. 운명적이랄까, 파켓은 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한국의 ‘시네마 천국’ 시대를 자연스럽게 목격하고 겪었다.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7),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인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2000), 박찬욱 감독을 무명에서 탈출시킨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 한국 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알리는 유수의 작품을 실시간으로 접한 그는 이때부터 한국 영화만의 새로운 미장센을 구축하는 힘 있는 영화가 등장했다고 회고했다. 
〈쉬리〉 포스터 © 강제규필름
〈공동경비구역 JSA〉 포스터 © 명필름
“당시 카페에 가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쉬리〉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을 수 있었어요.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왔을 때도 비슷했고요. 그런 모습을 목격하며 한국인은 영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잡지, 신문, TV 할 것 없이 영화 얘기가 끊이지 않았죠. 한국 사회에서 영화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았어요.”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특히 그는 영화에 관한 한국 관객의 뜨거운 반응에 크게 놀랐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흥행 영화 이야기가 등장하는 분위기는 온 사회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뿜어냈다. 아무리 엄청난 블록버스터 영화가 개봉하더라도 사회적인 이슈가 되지 않는 미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당시 영화를 다루는 주간지를 세 종류 이상 발간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을 거예요. 영화가 한국 문화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관객들의 호응과 관심 덕에 한국 영화 산업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영화와 사회가 밀접하게 소통하는 곳이었다. 그는 ‘코리안필름’에 한해를 결산하는 한국 영화 비평문을 남기고 있다. 2002년부터 2022년까지 20년 넘게 지속한 그만의 한국 영화 결산에는 매해 목격한 한국 영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파켓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영화는 기본적인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넘어 동시대 사람의 삶과 감정을 깊이 있게 담으려는 예술적 매체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근현대에 발발한 사회, 정치적 사건은 한국 영화 감독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우물이 되었다. 그는 〈변호인〉(2013), 〈1987〉(2017), 〈강철비〉(2017) 등 한국에서 흥행한 많은 영화들이 역사적 순간의 다양한 측면을 “성공적으로 포착했다”고 표현한다. “시의적절한 사회적 메시지”가 한국 관객을 움직이는 커다란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근현대사를 영화 소재로 적극적으로 다루는 독특한 나라다. 실제 일어난 사회, 정치적 사건을 재구성해 대중에게 선보이는 과정에서 영화는 사회적인 소통 창구 역할을 자연스레 습득했다. 파켓 또한 〈암살〉(2015), 〈밀정〉(2016), 〈택시운전사〉(2017) 등을 번역하며 젊은 세대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애환을 기억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런 기류는 지금도 한국 영화의 특징으로 꼽힌다.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한국 영화에 관심 있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메일을 자주 받는 편이에요. 근데 그들 또한 한국 영화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그는 한국 영화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전문가로 일하면서 그 ‘특별한 느낌’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었다. 바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파켓은 “한국 영화에서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직설적”이라고 말한다. 기술적인 스펙터클을 중시하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깊은 감정’이 영화의 중요한 스펙터클로 작용한다는 점을 콕 집어 이야기했다. 한국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겪는 감정을 관객이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구조를 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2009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를 보세요. 만약 미국에서 이런 재난 영화를 만든다면 분명 앞부분에서 재난의 스펙터클을 가장 먼저 기술적으로 보여줬을 거예요. 하지만 〈해운대〉는 어떤가요.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이들이 재난을 겪으며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지 자세하게 묘사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해운대〉 스틸컷 © JK필름, CJ E&M
파켓은 ‘감정의 스펙터클’이라는 표현으로 한국 대중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특징인 ‘신파성’을 역설한다. 《씨네21》 김소희 전 편집장은 “신파가 ‘눈물을 목표로 하는’ 유서 깊은 장르이며, 한국 영화사에서 깊은 역사적 연원과 사회적인 역할을 지녀 수많은 영화에 폭넓은 영감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영화계는 한국 영화가 감정을 내세우는 신파적 코드를 지니게 된 이유를 근현대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찾는다. 무력한 근현대사를 힘들게 버틴 대중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감수성이 바로 ‘비애의 미감’이라는 의견이다.
〈살인의 추억〉 스틸컷 © Sidus
“밥은 먹고 다니냐?”
— 영화 〈살인의 추억〉
영화에는 이미지와 사운드, 연기, 문화, 생활사, 역사적 맥락 등 수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파켓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은 이런 요소와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영화에 깃든 에너지를 관객이 잘 느낄 수 있도록 언어로 조율하는 행위다. 그는 한국 영화의 기저에 깔린 맥락을 이해하며 이를 ‘창조적 번역’의 영역으로 가져와 녹여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은 한국의 80년대를 배경으로 부조리와 혼돈이 팽배했던 당시 시대 분위기를 잘 표현한 수작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이 살인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던진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 명대사로 꼽힐 정도다. 파켓은 ‘밥’에 담긴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와 주인공이 용의자를 처음으로 ‘사람’으로 대하는 순간의 정서가 복합적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영미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담아, “Do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o?”라는 새로운 문장으로 탈바꿈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 모호필름
“마침내.”
— 영화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형사로 나오는 해준(박해일 분)이 살인 용의자인 서래(탕웨이 분)에게 속삭인 대사 또한 파켓의 번역관이 잘 스며든 사례다. 미묘하고 오묘한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은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서래의 언어 속 “마침내”라는 표현을 해준이 그대로 따라 하면서 사랑으로 치닫는다. 파켓은 ‘Finally’라는 익숙한 구어 대신 문어체의 ‘At last’를 선택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영화는 영상 매체이기 때문에 각주나 주석을 달 수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통용되지만 해외 관객에게 무척 낯선 표현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매진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짜파구리’를 라멘과 우동의 합성어인 ‘Ram-don’으로, ‘서울대’를 ‘Oxford University’로 번역한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그는 한국 문화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제 고향은 전체 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미국의 작은 마을이에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기생충〉에 관해 얘기해서 깜짝 놀랐어요.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니, 번역의 양상도 달라지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소주’를 다른 단어로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파켓은 《기아 디자인 매거진》과 인터뷰하며 한국 영화가 지닌 특질과 고유성이 세계적인 트렌드에서 점하는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장르에서 한국 영화가 어떤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부산행〉(2016)은 수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좀비 재난물이지만,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와는 다른 서정성이 존재한다. 이런 독특한 서정성이 만들어지는 맥락을 다시 짚어보는 일은 한국 영화의 미래에 꼭 필요하다. 또한 그는 독립영화의 가치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한국의 동시대적 맥락을 시의적절하게 담아내며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는 독립영화야말로 한국 영화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중요한 자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들꽃영화제는 2014년 창립 이래 올해로 10회를 맞이했다. © 들꽃영화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시작했던 20년 전에는 젊은 감독이 좀 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도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이런 환경을 발판 삼아 영화산업이 성장했죠. 지금은 영화 기술이 고도로 발전했지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은 도리어 예전에 비해 어려워졌어요.”
—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파켓은 지난 2014년 한국의 우수한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를 선정하는 들꽃영화상(현재 들꽃영화제)을 만들고, 집행위원장을 맡아 실험적이고 메시지가 강렬한 한국 독립영화 발굴에 힘써왔다. 그는 영화의 가치를 흥행 성적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독립영화가 지닌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주체가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열성적으로 영화를 소비한 관객 덕분에 한국 영화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현재 영화계를 휩쓰는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서 관객들의 관심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까닭이다. 이는 한국 영화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미닝오브
미닝오브는 인터뷰를 기반으로 영상과 출판, 전시를 기획·제작하는 스튜디오다. 한 사람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생애기록집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종로의 풍경들』(2021), 『이름 없는 갈비탕집』(2021), 『아카이브가 답한다』(2020)를 출간했다. 각 지역의 문화재단과 협업해 역사적 공간, 지역 예술가, 청년 창업가를 기록하는 일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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