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Vol.5
경계 없는 시퀀스
— 조경가 정영선
《기아 디자인 매거진》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을 만났습니다. 경관을 세밀하게 고려하는 조경은 사람이 공간을 받아들이는 모빌리티,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는 시퀀스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정영선 조경가가 말하는 한국의 경관 미학과 근대 미학자 고유섭의 생각을 겹쳐보며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의 갈래를 여럿으로 펼쳐봅니다.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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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지
촬영
김본희, 서시온, 안정연
편집
김본희, 정경희
장소
호암미술관 희원
About the Artist
정영선은 한국의 조경 설계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서구에서 시작한 조경의 개념을 한국의 국토와 경관에 맞게 정착시켰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는 정영선의 조경 작업은 한국 경관 미학의 전통적인 맥락을 이어간다. 1941년 태어난 그는 196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를 1기로 졸업했다. 이후 청주대 교수를 지내다 1987년 조경설계 서안을 설립했다. 최근에는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국내에서 조경 설계 분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에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예술의 전당, 호암미술관 전통정원 희원, 인천국제공항, 선유도공원, 청계광장 및 청계천 복원 사업 제1공구, 광화문광장,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화성 현대차 롤링힐스호텔,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원 다르마 뉴욕,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서울식물원, 경춘선 숲길 등 굵직한 프로젝트의 조경을 설계했다. 특히 빗물하수처리장을 재활용한 선유도공원 프로젝트는 전 국민에게 조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선유도공원은 미국조경가협회와 세계조경가협회에서 수상했으며, 뉴욕의 원 다르마 센터는 미국건축가협회에서 수상했다. 청계천 복원 사업과 서울식물원 또한 세계조경가협회에서 수상한 바 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2016
선유도공원, 2002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2007
《기아 디자인 매거진》은 ‘한국의 미학’에 골몰하는 야심찬 시도를 해보았다. 한국의 미학이라고 하면 왠지 고루하거나 현재와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의 미학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읽어낼 수 있는 고유의 성질이다. 특히 자연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우리와 공존했던 대상이다. 그만큼 자연을 통해 한국의 미학을 바라보는 시도는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일이 되지 않을까?
오전의 거센 소나기로 녹음이 한결 더 짙푸른 날, 한국 전통정원의 정수로 불리는 호암미술관 희원을 찾았다. 그곳을 설계한 정영선은  50여 년 가까이 조경가로서의 삶을 살아오며 한국의 식생, 자연관, 경관에 대해 고민해온 이다. 그가 한국의 미학과 자연이 얽힌 이야기를 한국의 경관 미학으로 풀어내며 대화를 시작했다.
호암미술관 희원
희원은 보화문, 매림, 소원, 주정, 계류, 꽃담, 양대, 월대, 읍청문, 후원, 부르델정원으로 이어진 동선이 돋보이는 정원이다. 한국의 정원은 서양의 정원처럼 들어서자마자 정원의 핵심이 눈앞에 모두 펼쳐지지 않는다. 정영선 조경가에 따르면 “문을 열고 또 열고 들어갈수록 새롭게 정원이 드러나는 시퀀스를 강조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시퀀스를 만드는 주인공은 희원의 낮은 담이다. 담을 낮게 둘러 주변의 풍경을 이내 관람자의 정원으로 삼는다. 자연을 흉내 내지 않고 자연을 곁에 두며, 차폐(가림)보다는 어울림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경관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거의 안 보인다.” 정영선 조경가의 말처럼 희원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연을 조금 다듬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나무, 꽃, 풀, 돌, 정자에 이르는 모든 요소는 그가 한땀 한땀 설계하고 구성한 결과물이다. 그야말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을 실현한 곳인 셈이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적요한 유모어, 어른 같은 아해, 구수한 큰맛’은 한국의 1세대 미학자인 우현 고유섭(1905-1944)의 표현이다. 상반된 뜻을 결합한 어구는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기교가 없는 기교, 계획이 없는 계획, 고즈넉하고 고요한 유머, 어른 같은 아이, 구수하면서도 큰 맛이란 어떤 것일까? 그 뜻을 짐작해보는 것만으로도 한국 미학이 가진 창조적인 모순에 대해 꽤 선명한 인상을 준다. 이처럼 ‘무엇이라 번역할 수 없는, 두 개의 모순된 성격이 동시에 성립된 것’을 한국의 특색으로 꼽은 그의 생각이 희원을 보는 눈과 겹쳐 읽힌다.
고유섭은 한국 미학의 성격을 특정한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분석했다. 즉, ‘구수한 큰맛’이란 ‘고수한 1) 작은맛’과의 상대적인 의미에서, ‘맵자하다는 것’은 ‘헐거운 것’과의 상대적인 의미에서, ‘단아’는 ‘온아’와 대칭되는 개념이 된다. 그의 표현은 정영선 조경가가 언급한 ‘검이불루 화이불치’, 즉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태도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이처럼 서로 다르지만, 함께 머물 수 있는 가치의 조합에 한국 미학이 오랜 기간 새겨져 있던 것은 아닐까?
조경은 식물과 식물 사이의 배치를 세밀하게 고려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곳을 거니는 보폭과, 바라보는 시선의 속도가 달라진다. 공간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모빌리티는 매번 새로워진다. 희원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시퀀스는 우리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잇는다. 시대를 관통하며 연결되는 한국 미학으로의 문이 지금도 활짝 열려있는 것처럼.
1) 구수함은 형태상의 순박함, 느린 속도, 깊음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것에 대한 미적 비평어다. 한국 미술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깊고 유장한 맛을 뜻한다. 반면 고수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구수함에 비해 내적으로 더 작고 응결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내외로 혼연한 풍미를 풍기는 구수함과 달리 안으로 응집된 상태다.
박수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예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상태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토마》(2021, 공동기획), 《7인의 지식인》(2020), 《노려본들 어쩔 것이냐》(2020, 공동기획), 《줌 백 카메라》(2019), 《유쾌한 뭉툭》(2018) 등을 기획했다. ‘Korea Research Fellow: 10x10’(2018, 2019),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2019)에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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