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Vol.10
우리가 열망하는 한복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우리극이 좋아 판소리, 동래학춤, 봉산탈춤을 배우고 극단에 들어간 사람, 해외 럭셔리 브랜드의 슈퍼바이저로 일한 사람, 서울시 무형문화재 11호 고(故) 박선영 침선장에게 배움을 청했던 사람, 오트 쿠튀르와 기성복의 경계를 넘나들며 옷을 만드는 사람. 얼핏 동떨어져 보이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는 ‘김영진’이라는 큰 줄기로 모입니다. 《기아 디자인 매거진》은 경계와 고정관념을 흔들며 한복에 생동을 불어넣은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을 만났습니다. 한복을 동시대 패션으로 이끄는 그에게 전통이란 옛것을 고정불변하게 계승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에 가깝죠. 김영진 디자이너는 전통과 패션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동시대 한복이 살아 숨 쉬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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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닝오브
연출
미닝오브
촬영
김본희, 정가현, 장채린, 백재령
편집
김본희
About the Artist
김영진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한복 디자이너다. 우리극을 하는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우리극 소품 만들기를 돕다가 처음 한복을 만났다. 이후 패션업계에 입성해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에서 10여 년간 슈퍼바이저로 일했다. 최고급 수입 원단을 직접 바잉하던 경험은 세계에 산재한 다양한 원단에 눈뜨는 계기가 됐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11호 고(故) 박선영 침선장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한복의 원형을 탄탄히 공부하고 시대별 한복을 두루 섭렵한 그는 2004년 맞춤 한복 브랜드 ‘차이 김영진’을 론칭했다. 한복의 멋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개성을 표현하는 차이 김영진은 BTS, 틸다 스윈튼, 정호연 등 국내외 다양한 유명인에게 의뢰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2013년 론칭한 기성 한복 브랜드 ‘차이킴’은 동시대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패션으로서의 한복이 지닌 가능성을 표출했다. 그는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 연극 〈햄릿〉, 영화 〈해어화〉, 창극 〈심청가〉 등 다양한 무대 의상을 비롯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배우 김태리의 의상을 연출하며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을 발휘 중이다.
레이스 소재와 레오퍼드 패턴이 한복에 등장하고, 조선시대 남성 무관의 정복인 ‘철릭’이 현대 여성복 ‘철릭 원피스’로 변신하면서 동시대 한복에는 김영진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그가 던진 신선한 제안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듯하다. “한복은 전통인가요, 패션인가요?”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복의 본질과 형식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시선과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김영진 디자이너와 마주 앉아 한복과 전통을 둘러싼 다양한 생각과 시도를 끊임없이 공유했다. 대화를 끝낼 무렵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람이 옷을 입는 행위에는 언제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담긴다는 것이다. 한복 역시 동일한 열망을 충실히 따라왔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 한복이 패션으로서 사람을 열망케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와의 대화에서 촉발한 의문은 지금 한복에 대해 우리가 던져야 할 신랄하면서도 꼭 필요한 화두였다.
“흔히 전통은 고정불변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해요. 모든 전통은 시대마다 변화를 거듭했어요. 한복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여성 한복은 시대에 따라 저고리 길이, 소매 모양, 치마 실루엣이 계속 바뀌었죠.”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한복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래 전통에 대한 의문은 김영진을 늘 따라다녔다. 전통을 해석하는 자신만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절박감은 우리나라 복식사를 공들여 공부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오랜 노력을 들여 얻은 답은 의외로 단출했다. 한복은 고정불변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바뀌는 패션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한복은 변화를 멈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선시대 초기만 하더라도 기다랗던 저고리는 18세기에 가슴 싸개가 드러날 정도로 짧아졌다가 19세기부터 다시 길어졌다. 소매 또한 길고 넓게 퍼진 모양이 점차 팔 길이와 폭에 딱 맞도록 바뀌며 18세기에는 마치 입고 꿰맨 것처럼 딱 맞는 직배래가 유행했다. 그러다가 19세기부터 소매 아래가 붕어 배처럼 볼록해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붕어배래로 바뀌었다. 치마 역시 넓게 퍼진 모양에서 치마 윗부분의 풍성함을 살리는 종 모양으로 변했다가, 18세기에는 풍성한 항아리 실루엣이 유행했다. 현재 보편적인 A 형태 치마는 고름으로 묶는 치마 대신 조끼치마가 19세기 이후 널리 퍼지면서 정착한 산물이다.
과천 출토 광주이씨 의복. 소매가 길고 넓어 조선 초기 사대부 여성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청송심씨 묘 출토 복식. 소매가 입고 꿰맨 듯 꼭 맞아 조선 후기 여성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친왕비가 입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황색 저고리. 소매가 붕어 배처럼 볼록해 20세기 여성 한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 국립고궁박물관
“전통이든, 패션이든, 한복의 본질은 멋과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움이야말로 패션의 포인트잖아요. ‘이렇게 입어야 전통이야’라는 말에 갇혀서 정작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최대한 지양했어요.”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스스로 한복의 미(美)에 대해 결론 내리기까지 그는 한복을 시대별로 직접 만들어 입어 보았다. 그 과정에서 18세기 후반 한복의 실루엣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가장 맞닿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 속 여인의 옷차림을 보면 치마는 풍성하고, 상의는 꼭 맞는 형태다. 18세기 후반 여성복의 전형적인 형태인 ‘하후상박’인데, 이런 특색을 모티브 삼아 론칭한 맞춤 한복 브랜드가 ‘차이 김영진’이다.
신윤복, 〈미인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양산 지산리 부부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그러나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붕어배래가 전통 한복의 선을 대표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한복을 두고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갑론을박이 오간 이유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직배래를 적용한 ‘차이 김영진’의 한복이 시중의 붕어배래보다 더 오래된 전통을 따른다. 그렇지만 그는 무엇이 더 전통에 가까운지 논리적으로 항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직배래와 붕어배래 모두를 만들어 주고, 그중 더 예쁜 것을 입으라며 선택권을 넘겼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직배래를 선택했다. 그의 안목과 자신감의 승리였다. 한복의 실루엣이 끊임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오직 변치 않고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이었다. 김영진은 한복 또한 패션에 속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결국 전통 또한 아름다움을 열망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전통의 본질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파악하고 디자인에 적용한 그는 대중의 관념에 깔리지 않고 남다른 제안과 시도를 지속했다.
“한복이라는 단어에 갇혀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건 제 방식이 아니에요. 만일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우리 복식은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기성 한복 브랜드 ‘차이킴’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어요.”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고정관념이 사라진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김영진은 자신의 상상을 눌러 담아 기성 한복 브랜드 ‘차이킴’을 론칭한다. 맞춤복은 특정 인물에 맞춰 모든 부분을 온전히 집중해야만 한다. 반면, 기성복은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감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상력에 대한 갈증에서 시작한 만큼, 차이킴에는 재미있는 발상을 담은 옷이 가득하다. 그 밑바탕에는 세계 각국의 복식을 꾸준히 공부하며 우리에게 걸맞은 요소를 발견하고 한복에 접목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복식에서 보이는 문양이 동양의 것과 닮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양 복식에서 찾을 수 있는 한복다운 요소를 끌어와 차이킴 의상에 적용하는 식이다. 차이킴이 추구하는 한복은 더 이상 계승해야만 하는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의 멋을 표현하는 패션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 차이킴의 수많은 의상 중 철릭 원피스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남성 복식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훨씬 패셔너블하고 다채로워요. 남성 중심의 관료 사회라는 시대상이 의복에도 반영됐던 거죠. 당시 발달했던 남성 복식의 특성에 착안해 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여러 실험 끝에 조선시대 무관의 정복이었던 철릭이 현대 여성을 위한 철릭 원피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서울시 무형문화재 11호 고(故) 박선영 침선장에게 한복을 배우던 시절, 김영진은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인 ‘요선철릭’을 만난다. 허리선을 따라 촘촘하게 주름을 잡은 요선철릭을 보며 그는 자연스럽게 여성이 입는 원피스를 떠올렸다. 기성 한복 브랜드 차이킴을 시작하며 현재와 과거, 전통과 외래,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등 대비되는 특성을 활용해 전에 없던 새로운 산물을 제시하는 데 집중한 그의 손을 거쳐 요선철릭은 여성을 위한 원피스로 변신했고, 이제 철릭 원피스는 디자이너 김영진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변수묘 출토 요선철릭 © 국립민속박물관
차이킴을 대표하는 철릭 원피스. 왼쪽은 기본적인 베이지색, 오른쪽은 차이킴에서 개발한 매난국죽 프린트 원단으로 제작했다. © 차이킴
철릭 원피스를 디자인할 때 그는 전통 복식을 현대 의복으로 풀어내는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보통 동양적인 복식을 세련되게 풀어낼 때는 서양 특유의 입체 재단을 맞바로 도입하는 경우가 흔했다. 김영진은 이런 접근이 너무 쉽고 뻔하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동양 특유의 평면 재단에 가깝게 디자인해 한복의 멋을 살리면서 예쁘고 편안하게 만들 수 없을까?’ 고민 끝에 가운데 부분에 평면 재단과 입체 재단을 함께 사용하면서 현대 여성복 트렌드에 맞춰 어깨를 좁히고 허리를 강조한 철릭 오피스가 탄생했다. 단순히 전통을 형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전통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 노력이 이룬 성과다.
재봉하기 전의 애기노랑저고리. 평면 재단의 특성을 한눈에 보여준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차이킴의 시그너처 아이템, 하늘꽃 철릭 원피스. 팔과 어깨, 허리선에 평면 재단과 입체 재단을 혼합해 차이킴만의 라인을 만들었다. © 차이킴
“태국 전통 의상에 쓰이는 타프타 실크는 실내조명에서 영롱한 빛을 발해요. 우리나라 전통 소재는 야외에서 굉장히 아름답죠. 야외에서 모든 예식을 올리는 시대는 지났고, 요즘은 실내에서 대부분의 예식을 진행합니다. 그래서 치마는 타프타 실크, 저고리는 우리나라 전통 소재를 사용하는 ‘믹스앤매치mix and match’를 통해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가져가려고 노력해요.”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원단부터 다르다. 김영진의 한복에 보내는 세간의 평가다. 단순히 고품질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전과는 ‘다른’ 원단으로 한복을 만든다. 한복에 잘 쓰이지 않던 울, 니트, 레이스를 과감히 사용하고, 레오퍼드, 체크 같은 강렬한 프린트를 적용하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다. 독창적인 믹스앤매치는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다. 조화롭게 어울려 사람들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는 요인이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대명사인 루이 비통에서 원단을 바잉하며 고급 원단의 중요성을 체감한 그는 탐나는 원단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디든 찾아간다. 브랜드의 감성을 살리는 원단을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태국 등 실크로 유명한 현지에 들러 원단을 꼼꼼히 살핀다. 이탈리아 최고급 실크 산지인 꼬모에서 한복을 위한 원단을 구매한 일화는 그녀의 믹스앤매치 감각을 짐작케 한다. 브랜드 한 곳에서 30가지가 넘는 원단을 골랐는데, 알고 보니 모두 동일한 디자이너가 참여했던 것. 브랜드 담당자도 놀란 해프닝은 자신이 만드는 한복, 전통, 디자인에 대한 치밀한 안목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고한 믿음과 철학을 가지고 있기에 한복의 범주에 새로운 소재와 프린트를 들이는 일에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다. 이런 변주는 한복과 동시대 간에 드리워진 시차를 거침없이 지워버린다.
이탈리아 코모 지방에서 만든 실크 프린트 원단을 사용한 차이 김영진의 한복 © 차이 김영진
체크무늬 원단을 사용한 차이 김영진의 한복 © 차이 김영진
“사람이 옷을 입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위와 추위를 막기 위한 기능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 본질은 아름다움에 있다고 생각해요. 옷은 사람과 아름다움을 이어주니까요.”
—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김영진은 말한다. 패션의 본질은 아름다움에 있다고. 한복 또한 아름다움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제는 전통을 확장하며 형식이 아니라 본질에 해당하는 미(美)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믿는다. 옛 남성의 의관을 현대 여성복으로 풀어내고, 해외 고급 원단을 한복에 자유롭게 접목하는 김영진의 시도를 통해, 우리는 한복이 편견에서 벗어나 전통의 핵심을 꿰뚫을 때 얼마나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알아챈다. ‘고정관념을 벗고 본질을 입은’ 한복을 통해서.
K컬처가 전 세계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지금, 한복은 동시대적 전통에 근간을 둔 세계적인 패션으로 성장할지, 아니면 고리타분한 관념에 갇혀 존재감이 희미해질지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사람들이 K컬처를 열망하는 이유는 K라는 라벨 때문이 아니라, 열망의 마음을 숨기지 못할 만큼 K컬처가 고유의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도 마찬가지다. 정말 사람들이 열망할 만한 예를 제시해야 K컬처의 줄기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다. 이 새로운 기로에서 우리가 고민할 거리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본질을 잊지 않고 동시대의 전통에 주목하는 일이면 족하다.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이 18세기도, 19세기도 아닌 바로 지금 21세기의 전통으로 아름다움을 축조하는 것처럼.
미닝오브
미닝오브는 인터뷰를 기반으로 영상과 출판, 전시를 기획·제작하는 스튜디오다. 한 사람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생애기록집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종로의 풍경들』(2021), 『이름 없는 갈비탕집』(2021), 『아카이브가 답한다』(2020)를 출간했다. 각 지역의 문화재단과 협업해 역사적 공간, 지역 예술가, 청년 창업가를 기록하는 일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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