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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이인화
영원의 물질에 빛을 담다
강원도 양구에 자리한 스튜디오 소만. 큰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창가에 놓인 백자에 담긴다. 투광성을 주제로 작업하는 이인화 작가는 양구에서 작업한 뒤로 하루를 더 다채롭게 느낀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는 백자에 찬란한 햇살이 담기는 순간도, 비가 내리는 날 은은하게 빛이 들어오는 순간도 모두 특별하기 때문이다. 양구는 400여 년 전부터 조선백자를 만들던 양구 백토가 있는 곳이다. 스튜디오 소만에서 차로 30분 정도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백자 유물이 많이 출토된 방산면이 나온다. 이곳에는 고려 말부터 이미 백자를 구울 수 있는 기술과 가마가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왕실 도자기를 만들던 이천으로 흙을 공납했다. 양구군은 방산면에 양구백자박물관을 설립했고, 양구 백토의 전통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201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MOU를 체결하며 백자연구소를 만들었다. 이인화 작가는 2015년 남편인 도예가 김덕호와 함께 백자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부임하며 양구 생활을 시작했다. 이인화 작가의 백자는 양구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더욱더 자주 만나고 있다.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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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미영
촬영
Salt Studio
편집
Double-D
자료제공
스튜디오 소만
About the Interviewee
이인화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국제공모전 대상,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인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창덕궁 규장각, 아모레퍼시픽 뮤지엄, 양구백자박물관,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V&A), 로마 교황청 등에서 작품을 영구 소장 중이다. 현재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스튜디오 소만에서 백자의 ‘투광성’을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Q1.
양구에서 작업한 지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처음에는 양구백자박물관 백자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오셨죠. 이후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양구의 깨끗한 환경이 너무 좋았어요. 은하수가 보이고 1급수 하천이 흐를 정도예요. 연구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굳이 다시 도시로 돌아가지 말고 양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박수근미술관에서 조성한 예술인 마을의 토지 분양 공고를 봤어요. 여기에 지원해서 심사를 통과하고 지난 2020년 스튜디오 소만을 지었습니다.
Q2.
작가님의 투광성 작업을 보면 변화하는 자연광이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하지만 두께를 1~2mm 정도까지 얇게 깎아야 해서 무척 까다로운데요. 이런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시작은 작은 우연이었어요. 2009년 학교에서 작업하다가 두께를 잘못 맞춰서 제 의도보다 어떤 부분을 너무 얇게 깎게 됐어요. 찢어질 것처럼 얇게 깎은 작품을 잠시 창가에 뒀는데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따라 빛이 비치는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더군요. 백자의 투광성은 유리나 반투명 유리와는 달라요. 마치 눈을 감고 있을 때 빛이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죠. 면사포를 씌운 느낌 같기도 하고요. 조각보를 걸어 두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면서 명주를 덧댄 부분에 따라 햇빛이 다르게 비치는데요. 그런 장면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유리가 서구적인 느낌이라면 한지나 조각보 천에 빛이 투과하는 느낌은 한국적이에요. 백자에서 이를 경험하고 이상할 정도로 끌렸어요. 그 후 투광성을 주제로 여러 시도를 하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Q3.
양구에서의 생활은 투광성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양구에 온 뒤로 가장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요.
작업의 주제에 대한 생각이 더 명료해진 것 같아요. 양구에 와서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아직 겨울이라고 느낄 만큼 추운데도 어르신들은 밭을 갈면서 농사를 준비하세요. 그리고 조금 지나면 파종하시죠. 계절을 무척 명확히 알고 계신 거예요. 해가 뜨고 구름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그런 순간순간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따라 다른 빛이 비치는 걸 느끼는 정도였다면, 여기서는 매번 다른 느낌을 받아요. 오후에 서쪽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 그 빛을 담은 도자기의 색깔이 다르고, 또 겨울 아침 남쪽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았을 때 투과하는 느낌이 달라요. 계절과 시간을 명확하게 세분화하면서 경험하고 느끼기 시작하니, 제 작업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어요.
Q4.
양구 백토는 조선백자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에 많은 이가 사용하고 싶은 귀한 재료죠. 가공한 백자토와는 다른 양구 백토만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요?
양구 백토는 양구에 거주하는 작가만 해마다 한정적으로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어요. 채굴 과정에서 자연환경을 훼손하기 때문에 채굴권을 가진 양구군은 새로운 채굴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서 유물을 발굴하던 당시에 채굴한 흙만 남아있는 상태예요. 기존의 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전통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이어가는 것도 전통을 지키는 방식이라는 관점이 있었죠. 요즘은 좋은 가공토가 많아요. 그런 재료와 비교했을 때 양구 백토가 물성적인 면에서 월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양구 백토라는 물질에 담긴 역사와 전통이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양구 백토를 공납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나와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도석을 찾아서 불순물을 긁어내고 방아로 잘게 부숴 고운 입자로 만든 뒤 다시 점토만을 걸러내는 무수한 과정을 거쳐서 흙을 만듭니다. 하나의 백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긴 시간과 많은 손길이 필요하죠. 양구 백토는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Q5.
재료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전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과정에 의미를 두는 태도가 빛을 담고 투과하는 작가님의 작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나의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겨있어요. 현대인은 이런 과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결과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만약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부분을 느낄 수 있다면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삶도 훨씬 더 풍요로워질 거예요.
Q6.
한정적이고 희소한 재료인 양구 백토가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궁금해요.
큰 형태를 빚을 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보통 유약에 활용합니다. 유약은 흙에 돌가루를 섞어 녹인 유리인데요. 본래의 흙과 유리 사이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백토를 넣어요. 작품을 감싸는 유약에 들어가는 양구 백토의 양은 작품 전체에서 1~2% 정도를 차지하지만, 상당히 다른 발색을 만들어 냅니다. 어느 정도 유리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투광도 잘 되죠. 대신 수축률이 맞아야 해요. 흙이 고온의 가마에 들어가면 15% 정도 수축하기 때문에 유약도 같은 비율로 따라가야 하는데요. 그동안 수축률이 딱 맞는 유약을 찾지 못했어요. 백자연구소에서 양구 백토를 사용한 유약을 실험하며 두께가 얇은 작업에 맞는 유약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유약을 올리는 투광성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Q7.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흙을 건조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시나요? 반복되는 과정과 기나긴 시간에 지칠 때 조금 더 편리한 작업 방식을 생각한 적도 있나요?
흙이 습기와 만나 형태를 갖추는 순간부터 건조가 진행돼요. 흙이 말라버리면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으니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물레 성형으로 깎아냅니다. 농사짓는 분들이 절기에 따라 일하는 것처럼 필요한 순간에 딱 맞춰 그 자리에 있어야 해요.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고 건너뛰는 것도 안 돼요. 무조건 하나씩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만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에 저는 시간에 얽매일 수밖에 없죠. 그게 싫다고 편리한 방향으로 갈 수는 없어요. 도예 작업에 쓰이는 최신 설비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부분과 인간이 재료와 기술을 온전히 체득해서 만들었을 때의 느낌이 달라요. 오랜 시간 연습하고 작업하면서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한다는 만족감도 상당히 큽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힘들 때도 있지만 제가 지금까지 해온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힘이 나기도 해요. 이런 작업을 하려면 누구나 그만큼 오랜 시간을 거쳐야 하니, 굉장히 정직한 작업이란 생각도 들어요.
Q8.
인공지능 시대를 내다보는 시점에서 직접 만드는 도예 작업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네요. 전통적이면서도 수행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맞아요. 사실 도예는 재료를 다루고 만드는 과정이 굉장히 명상적이기도 하거든요. 심리적인 부분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서툴더라도 조금씩 나아지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분야예요. 그래서 저는 도자 작업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요즘 곳곳마다 도예 클래스가 개설되는 현상은 정말 반가운 일이죠.
Q9.
도예 작품은 단순히 감상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삶에서 활용할 수 있잖아요. 자연 가까이에서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해 작업하는 입장에서 동시대와 공감하는 미감을 어떻게 표현하나요?
김덕호 작가와 저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모던하고 간결한 형태를 좋아한다는 건데요. 저희는 굉장히 현대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해외 전시에서는 한국적이라는 반응을 듣는 게 흥미로워요. 굽이 없는 ‘볼bowl’을 만들고 그런 평을 들으니 신기하더라고요. 저는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업하지만, 전통적인 형태나 기능에 집착하진 않아요. 제 작업은 현대를 살아가며 순간순간 느끼는 아름다움의 잔상을 찾고 있어요. 백색의 잔상인데요. CMYK로 특정하는 색이 아니라, 수천, 수만 가지의 감상이 느껴지는 백색이에요. 백색의 물질을 다루며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흔적을 찾는 게 아닌가 합니다.
Q10.
앞으로 어떤 작업을 더 해보고 싶으세요? 예정된 전시 계획도 궁금합니다.
제 작업은 빛의 변화를 느끼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운이 남는 특징이 있는데요. 보통 전시장에는 자연광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작품을 보여드리는 방식이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평면 작업을 시도하고 있어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걸 생각하는데, 도자기의 세부적인 부분을 확대해 투광의 찰나를 표현하고 싶어요. 내년에는 해외 전시가 예정돼 있습니다. 3월 런던 서머싯 하우스에서 열리는 프리미어 공예 아트 페어 ‘콜렉트Collect’에 참가하고, 이후 영국 스트랫퍼드 갤러리Stratford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에요.
글
안미영
안미영은 기자, 작가, 인터뷰어로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노블레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일했고 에세이와 여행서 등 4권의 책을 출간했다. 현재 프리랜스 에디터이자 카피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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