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소리꾼 이희문
전통은 이 시대에 살아있는 것
이희문은 데뷔 당시부터 많은 주목을 받은 소리꾼이다. 초반에는 여성이 대다수인 경기민요에 흔치 않은 남성 소리꾼으로, 이후에는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하고 자유로운 스타일의 음악과 비주얼로 늘 화제가 됐다. ‘오더메이드 레퍼토리’로 복합장르를 시도하며 경기민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민요 록밴드 ‘씽씽SsingSsing’, 재즈그룹 프렐류드와 협업한 ‘한국남자’ 프로젝트, 밴드 오방神과(OBSG), ‘깊은사랑’ 시리즈, ‘날(陧)’ 등을 통해 여러 아티스트와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해왔다. 소리길로 접어든 지 20년이 된 지난해, 그는 자전적 레퍼토리인 ‘강남’ 시리즈의 첫 번째 공연 ‘강남오아시스’를 무대에 올렸고 연말에는 ‘한달한옥’이라는 타이틀로 경기 12잡가를 완창하는 특별한 시간도 가졌다. ‘전통을 하는 사람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 이희문은 세간의 선입견에 반문한다. 그가 생각하는 전통은 무엇이고, 장르를 넘나드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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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영
촬영
Salt Studio
편집
Double-D
자료제공
이희문컴퍼니
About the Interviewee
이희문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로 경기민요 고주랑 명창의 아들이다. 영상을 전공하고 뮤직비디오 연출을 하다가 27세에 이춘희 명창의 권유로 소리를 시작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추구하는 그는 2010년 전국민요경창대회 종합부문 대통령상, 2014년 KBS 국악대상 민요상, 2015년 제23회 전통예술부문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21년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 유공자 포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Q1.
본격적으로 소리를 시작한 때가 2003년이니 작년에 딱 2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뜻깊은 공연도 있었죠. 12월 한 달간 매일 〈이희문 X 아름지기 ‘한달한옥’〉을 진행하며 경기 12잡가를 완창했어요.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아요.
판소리를 하는 분에게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이 꿈이라면 경기민요를 하는 사람에게는 경기 12잡가 1)가 있어요. 언젠가 한 번 경기 12잡가를 완창하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작년에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옥의 자연 음향과 울림이 참 좋아서 아름지기에 제안했어요. 제가 한옥에 실제 거주하면서 매일 손님을 초대해 소리와 다과, 이야기를 즐기는 콘셉트였죠. 공연장과 달리 소수의 관객만 모실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한 달이란 기간이 필요했어요. 12곡을 완창하면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이야기를 섞어가며 4시간 정도의 공연으로 구성했죠. 어떤 날은 5시간 공연하기도 했고요. 소리꾼은 하절기와 동절기, 한 번씩 산에 들어가 스승님께 하루 종일 소리만 배우는 수련 과정이 있는데요. 그런 수련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구 하나만 앞에 놓고 긴 시간을 공연한다는 게 무척 특별하면서도 두려움이 생기는 지점이었죠. 목이 잘 버틸지 모르는 무모한 상태로 시작했지만, 다행히 마지막까지 잘 마쳤습니다.
한달한옥 © 이희문
Q2.
기존의 틀을 깨는 방식으로 새로운 공연을 많이 열었습니다. 최근 선보인 작품은 자전적 레퍼토리였죠. 작년에는 3년간 진행하는 ‘강남’ 3부작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작사에도 참여했어요.
기존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제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민요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제 이야기가 민요를 하는 제 행보에 뒷받침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전통민요를 모티브 삼아 바꾸거나, 함께 작업한 뮤지션 까데호의 기타리스트 이태훈 씨가 새롭게 작곡한 곡으로 구성했어요. 제 이야기를 담기 위해 직접 작사도 했죠. 지난해 첫 작품인 ‘강남오아시스’에 이어서 올 11월에는 ‘강남’ 시리즈 2부를 공연할 계획이에요.
〈강남오아시스〉, 2022, 제공: 이희문컴퍼니 © 이희문
Q3.
전통음악 중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된 경기민요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경기민요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 말 고종황제 때 당대의 스타였던 박춘재 명창이 있어요. 워낙 재담이 뛰어났고 풍자적인 노래를 잘하셨는데, 그게 오늘날의 개그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경기민요에는 즐거운 내용도, 슬픈 내용도 있는데 슬픈 내용의 곡들은 반어적으로 표현해요. 대부분 장조를 쓰거나, 더 화려한 선율로 노래하는 식이죠. 그게 마치 블랙 코미디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는 그런 점이 서울 사람의 성품을 대변하고, 경기민요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Q4.
경기민요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의 융합을 시도 중입니다. 과감하게 경계 넘는 일을 도전하게 된 음악적 변곡점은 언제였나요?
2008년부터 직접 공연을 제작하면서 변화에 대해 계속 고민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만큼 큰 변화가 있진 않았죠. 그러던 2013년, 현대무용을 하시는 안은미 선생님께 제 공연의 연출을 부탁드리며 그 영향을 받아 다양한 시도를 해보게 됐습니다. 안은미 선생님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할 때가 가장 빛난다’며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민해경, 마돈나처럼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당신이 연출가로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시겠다고 했죠. 많은 자극과 동기를 부여하던 그 순간이 가장 큰 변곡점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Q5.
그 공연이 바로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雜)’이죠. 이듬해인 2014년 ‘쾌(快)’까지 거치며 의상과 메이크업 등 비주얼 측면에서 과감한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한복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남자 소리꾼의 패션으로는 무척 놀라웠어요.
경기민요를 하는 남성 소리꾼이 드문 상황에서 정체성을 규정지을 수 없는 복장으로 소리를 하는 와중에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보며 여성 소리꾼을 흉내 내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그게 그냥 즐거웠죠.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고, 제가 전통음악을 하니까 더욱더 그랬겠지만, 안은미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저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반짝이 옷을 입으면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스트레스로 인한 역류성 식도염까지 생기는 등의 반작용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겪은 이후로는 면역력이 생겼는지 더 과감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발이든 하이힐이든 일단 해보고 나니 별 게 아니었던 거죠. 분야를 막론하고 동시대성은 꼭 필요하고, 지금 이 시대에는 비주얼에 관한 패션 철학이 중요해요.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이 늘 변함없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전통음악이 박물관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 폐쇄적인 태도는 저와 맞지 않았어요. 저는 전통음악 무대에서 관객에게 판타지를 준다는 마음으로 남들과 다르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막상 해보니 퍼포머로서 또 다른 인격체로 바뀌는 느낌이 들고 자신감도 생기더군요. 소리를 하기 전에 뮤직비디오 연출을 했던 경험이 비주얼과 환상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요. 제가 추구한 비주얼은 동료와 후배에게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6.
전통음악과 동시대 사운드가 만나 이질감이 아닌 시너지를 내뿜는 공연이 많습니다. 재즈밴드 프렐류드와 함께한 한국남자, 노선택이 이끄는 허송세월 밴드와 놈놈이 함께한 OBSG처럼 서로 다른 음악을 하는 뮤지션과는 어떻게 협업하시나요?
저는 사람이 먼저인 것 같아요. 어떤 음악을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그동안 활동하면서 알게 된 뮤지션에게 매력을 느끼고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시작하죠.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지만 의외로 전통음악에 가까이 다가온 뮤지션이 존재하거든요. 그런 사람과 협업하다 보면 이런저런 경계가 무너지고 원칙 또한 깨지죠. 하지만 제가 지닌 전통 소리와 창법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뮤지션을 만나더라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본기를 다져왔고 소리를 해왔으니까요. 후배에게도 늘 기본기가 탄탄해야 다른 뮤지션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OBSG 공연 장면 © 이희문
Q7.
지금까지의 활동에서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s’ 출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때 함께했던 밴드 씽씽은 해체했지만요. 한국 전통음악을 기반 삼은 사운드가 해외에서 회자되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단, 사운드에서 이질감을 별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커요. 일반적인 밴드 사운드를 많이 차용하고 다양한 리듬에 맞는 민요를 대입해서 노래를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씽씽의 노래에는 한국적이라고 느낄 만한 요소가 있어요. 경기민요 특유의 발성에서 비롯한 것인데요. 비록 스타일링은 서구적이라도, 한국적인 뉘앙스와 몸 사위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모습이 그들에게 색다르게 다가갔을 거예요. 많이 낯설지는 않으면서 신선한 느낌이죠.
Q8.
경기민요 이수자가 전통의 틀을 벗어나는 광경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전통에 대해 계속 고민했겠지요. 희문 님이 생각하는 전통은 무엇일까요?
저는 전통이 어딘가에 머무르거나 박제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통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대상은 과거에 유행하며 많은 사람이 즐겼던 것이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강력한 생명력 덕분이죠. 더불어 누군가 다른 이의 소리를 똑같이 따라 하기란 불가능해요. 사람의 목소리와 구강 구조, 느낌이 모두 다르니 결국 고유화가 진행됩니다. 제가 소리를 하면 그건 이희문의 소리인 거죠. 유물 같은 유형 유산과는 달리, 무형 유산은 살아있는 정신과 DNA가 전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남자’ 공연 장면 © 이희문
Q9.
자기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 창의적인 작업을 시도하면서 ‘이 정도로 파격적이어도 괜찮을까?’, ‘이렇게까지 선을 넘어도 될까?’ 고민하는 아티스트에게 조언해주신다면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시도하는가, 생각에만 그치는가의 차이죠. 제 작업은 결코 완벽하지 않아요. 일단 세상에 꺼내 놓아봐야 어떻게 될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게 됩니다. 예상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 하기 전에는 모르는 거죠. 그래서 우선 내놓은 후 그때부터 보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레퍼토리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만약 현실적인 뒷받침이 된다면, 투자도 해보고 별의별 것을 다 시도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Q10.
앞으로는 어떤 레퍼토리가 이어질까요? 올해 만날 작품이 궁금합니다.
가깝게는 4월 2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이희문프로젝트 날(陧)’ 공연이 있어요. OBSG도 지금 한창 2집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5~6월에 블루스퀘어와 경기아트센터에서 공연합니다. 기존 곡들과 함께 신곡도 공개할 거예요. ‘강남오아시스’는 일본 공연이 성사되어 6월 초 도쿄에서 열릴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강남’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도 구상 중이고요. 올 하반기에는 LA에서 전시하는 한국 미술 작가의 작업에 음악으로 참여할 예정입니다.
1) 19세기 서울 청파동 일대의 소리꾼이 널리 부르던 민중가요.
안미영
기자, 작가, 인터뷰어로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노블레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일했고 에세이와 여행서 등 4권의 책을 출간했다. 현재 프리랜스 에디터이자 카피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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