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김주원
깊이 파고 들어가면 통하는 새로운 세계
그는 한결같은 자기 관리와 연습으로 국립발레단 역사상 현역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발레리나다. 출연 작품마다 뛰어난 테크닉은 물론, 배역과 극 흐름의 섬세한 해석과 개성 있는 표현력을 인정 받았다. 국립발레단에서 은퇴한 후로는 발레는 물론 뮤지컬, 연극, 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클래식 발레의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대범한 시도를 해 나가는 그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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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임
촬영
Salt Studio
편집
Double-D
About the Interviewee
김주원은 선화예술중학교에 다니다가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볼쇼이 발레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1998년 국립발레단 〈해적〉으로 데뷔 후, 15년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약했다. 2000년 한국발레협회 신인상, 2001년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여자부 동상, 2004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으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무용계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하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리나로 인정 받았다. 2012년 국립발레단을 떠난 후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무용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Q1.
초등학교 5학년 때 ‘재밌어서’ 발레를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지금까지 발레를 계속할 수 있던 원동력과 그 매력은 무엇인가요?
어렸을 때 발레 외에도 여러 가지를 배울 기회가 있었어요. 피아노, 성악, 바이올린, 태권도, 기계체조, 테니스를 배웠고 심지어 육상선수도 했어요. 다 재미없더라고요. 하지만 발레는 지겹지 않았어요. 지금 곱씹어 보면 예술은 누구를 이기거나 기록을 세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혼자 자기 색깔을 찾아가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입해야 하고요. 제가 느끼는 것을 다른 이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삶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백조의 호수〉, 2009, 제공: 국립발레단
Q2.
클래식 발레는 서양인의 몸과 문화를 기준으로 발달한 춤이에요. 그래서 배경이 되는 스토리, 춤이 지향하는 움직임, 신체 구조가 매우 다르다 들었습니다. 동양인으로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춤을 만났을 때 체감한 낯설고 이질적인 지점이 궁금해요.
발레는 서양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몸의 라인과 조건이 아주 중요한 예술이에요. 사실 저는 발레에 그렇게 좋은 신체 조건을 타고난 발레리나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게 또 ‘예술’이잖아요. 몸의 라인만 보여주는 단순한 움직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정서나 철학을 담아야 하죠. 몸에 대한 콤플렉스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춤에 저의 정서나 철학을 담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할 당시에도, 클래식 작품 안에서 동양인이 표현하는 캐릭터의 표현이 상당히 섬세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Q3.
그렇다면 이런 낯설고 이질적인 지점은 김주원이란 무용가 안에서 어떻게 작용 및 수렴했나요?
오히려 완벽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던 부분 덕분에 제가 예술가로 성장하고 발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을 찾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저의 콤플렉스, 자격지심이 건강한 자양분이었던 거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노력의 원동력이기도 했고, 저만의 표현력을 찾기 위한 힘이 되기도 했어요. 또 예술적인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할 때 제 안에 터지지 않은 폭탄 같은 존재가 힘이 돼주었죠.
Q4.
지난 6월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레베랑스Révérence〉를 공연하셨어요. 프랑스어로 존경, (존경을 담은) 인사를 뜻하는 ‘레베랑스’는 발레 무용수가 공연을 끝낸 후 커튼콜에서 관객을 향해 무릎 굽혀 인사하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름의 공연을 준비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레베랑스〉는 원래 연습실에서의 공연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작품이에요. 연습실에 감사하고 싶었거든요. 관객이 보는 제 무대 위 두 시간의 이면에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365일 연습실과 함께했던 시간이 있어요. 더불어 25년 동안 프로 무용수로 활동하며 만났던 모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숱한 부상을 겪으면서도 아직 토슈즈를 신고 춤출 수 있는 상황,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동료 무용수, 그리고 스태프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Q5.
레베랑스는 본래 정해진 방법이 있지만, 무용수 각자의 개성을 담은 레베랑스도 가능하다고 알고 있어요. 클래식 음악에서의 ‘카덴차Cadenza’처럼 말이죠. 오랜 역사를 통해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발레에서 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자유롭게 담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클래식 발레는 엄청나게 많은 발레리나가 정해진 음악에 정해진 안무를 오랜 시대를 거쳐 춰왔어요. 클래식이 힘든 이유는 교과서처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답이 명백히 있기 때문이에요. 실수하면 실수한 거고, 바퀴 수를 채우지 않으면 채우지 않은 거고. 다리 높이가 낮거나 과하게 높은 것도 안 돼요. 그래서 저희는 더 깊어져야 하죠. 하지만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틀 밖으로 확장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쉼 없이 연습하면서 신체 기능은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연습을 거듭하며 음악을 내 몸과 동작에 집어넣어야 해요. 그렇게 작품을 제 것으로 만든 후에 표현하는 호흡은 발레리나 각자의 몫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의 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는 춤에 가까워요. 지나가는 과정에 섬세함과 완벽을 기하는 편이에요. 이 포즈에서 저 포즈로 내가 어떻게 가는지, 여기에서 저기로 시선을 돌릴 때 어떻게, 왜 도는지 그 의미와 명분, 그리고 호흡이 중요한 거죠. 그런 차이가 클래식 발레에서 마음껏 자유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Q6.
2007년 국립발레단 활동 10주년을 기념해 이정윤 안무가와 진행한 듀엣 공연 〈더 원The One〉, 국수호의 춤 음악극 〈사도- 사도세자 이야기〉, 2020년 정동극장 25주년 기념 공연 〈김주원의 사군자-생의 계절〉에 이르기까지 한국 무용가와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발레와는 다른 한국 춤의 특징과 그 매력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의외로 비슷한 점도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중학교 때 러시아로 유학가면서 한국 무용을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다 국립발레단에서 국수호 선생님, 이정윤 씨와 작업을 하게 되었죠. 발레는 하늘로 날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하는 서양 예술이에요. 그런데 한국 무용은 땅과 친숙한 춤이랍니다. 시작부터 너무 다르지만 재미있었어요. 더불어 춤을 추며 느낀 점은 결과적으로 두 춤이 똑같다는 거예요. 바닥에 닿는 제 무게와 호흡을 얼마나 완벽히 인지하는가에 따라 훨씬 중력이 없는 것처럼 춤출 수 있고, 얼마나 내 몸을 가볍게 컨트롤하는지에 따라 바닥에 붙어 춤추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요. 결국 어느 지점에 도달한 무용수의 호흡은 장르를 불문하고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발레는 엑센트가 있기 때문에 호흡이 끊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무대에서 춤을 시작한 후 끝내고 퇴장하는 순간까지 제 호흡은 하나거든요. 한국 무용도 그렇더라고요.
Q7.
Q7. 2010년 뮤지컬 〈컨택트〉로 더 뮤지컬어워즈 여우신인상을 받은 이래, 뮤지컬 〈팬텀〉, 연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와 작업해 오셨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와 만날 때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다름’을 마주하나요?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새로운 작업과 환경에 저를 던지는 시도가 제게 엄청난 공부와 영감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저는 머물러 있기보다 흘러가고 싶어요. 국립발레단에 있을 때는 모범 단원이었거든요. (웃음) 그런데 발레단에서 나온 후 깨달았어요. ‘아, 나는 정말 춤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내 춤을 출 수 있는 환경에서 나는 네모가 될 수 있고, 세모가 될 수 있구나. 아, 나는 정말 춤을 사랑하는구나. 소통하는 게 너무도 중요하구나.’
〈지젤〉, 2012, 제공: 국립발레단 © 국립발레단
〈팬텀〉, 2018, 제공: EMK뮤지컬컴퍼니 © EMK뮤지컬컴퍼니
Q8.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발레가 오늘날의 관객에 새롭게 다가가고 여전히 살아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오랜 기간 공들이고 숙성한 것에서 나오는 에너지나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오랜 연습 기간을 거친 무용수가 무대에서 춤출 때, 그 시간과 노력의 에너지는 춤에 담겨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지금 엄청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이런 호흡 속에서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산물을 대할 때 갖게 되는 평온함, 알 수 없는 위로와 쉴 수 있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클래식 발레가 지금도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김연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다. 기획자, 편집자, 교육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 《inter:VIEW》, 웹진 《춤:in》 편집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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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엽의 인터뷰